나는 만 19살부터 37인 지금까지 20년 가까이 원인모를 두통으로 괴로웠고,
두통으로 인해 인생을 하루속히 마감하고 싶다는 충동에 늘 시달리며 살아왔다.
편두통이 심한 분들은 너무나 잘 이해할 것이다.
편두통 발작이 왔을 때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차라리 죽는게 나을법 한 고통속에 어두운 방안을 몸부림치며
노란 위액을 몇번이나 토해가며 제발 이 고통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무력감을.
두통은 공포였고
트라우마 였으며
내 삶에 가장 큰 불청객이었다.
나는 한달 동안 두통없이 머리가 깨끗하고 정상적인 상태가
1-2일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두통이 심했다가
지금은 여러가지 치료와 자가실험(?), 환경변화 등을 통해서 거의 두통이 오지 않을 정도로 증상이 개선되었다.
(참고로 완전히 두통이 없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생리끝 무렵에는 머리가 아프고 배란일이 되면 괴롭다.)
오늘은 내 길고도 긴 두통의 역사와 치료 썰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잦은 두통으로 오늘도 어두운 방 안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계시는 분들께 실낱같은 도움이 되길 바라며...
1. 두통의 시작
나는 두통 체질이다.
체질적으로 두통이 잘 오고 자주 온다.
처음 두통이 시작된건 고 3때였다.
불쌍한 대한민국의 고3.
고 3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대학입시와 매일의 공부 노르마로 인해
가장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때가 아닌가.
그때 나의 두통은 시작되었다.
내로라하는 강남의 학군지도 아니었고 강북의 그저 평범한 인문계 고등학교 였을 뿐인 우리 학교 스케줄은
아침 7시에 등교, 4시반에 수업을 마치면 5시에 석식을 먹고
6시부터 무려 밤 12시까지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실시했다.
(솔직하게 지금은 학대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모든 고3 학생들이 6시부터 10시까지의 야간자율학습에 참여해야 했고
부모님이 데리러 올 수 있는 사람에 한해 10시부터 12시까지 더 공부를 하게 해주었다.
나도 그 중 한명이어서 꾸역꾸역 밤 12시까지 야자를 하고 집에 왔다.
잠? 당연히 부족했다.
현재 나의 적정 수면시간은 8시간인데 그 당시에는 5시간정도 잤던 것 같다.
스트레스? 당연히 많았다.
고 3의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스트레스는 내 몸과 정신을 갉아먹었다.
2. 두통에 취약한 체질, 체형
그리고 내 체형도 두통이 오기 쉬운 체형이었다.
스트레이트 넥 이었고 큰 가슴은 항상 목과 어깨를 짓누르듯 근육통을 발생시켰고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서 문제집을 풀어야하는 생활이 1년이 지속되자
스트레스에 취약하던 성격은 조금의 불편함이 생기면 바로 신체증상인 두통으로 발현되기 시작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외할머니께서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하셨다고 하는데
아마 유전적으로 뇌혈관이 민감하고 두통에 취약한 유전자 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 홀로 일본에 유학을 하게 된다.
넉넉치 못한 형편에 해외를 나왔고 혼자 생활을 하며 공부하며 알바로 생활비까지 충당해야 했기에
고 3 못지 않은 수면부족은 물론이거니와 부모님과 함께 있을 때 처럼 밸런스 좋은 식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건강관리를 하지 못한 채 몇년동안 타지 생활을 이어갔다.
3. 사회생활 불가판정. 요양 필요
대학을 졸업하고 25세 전후에 매장직으로 첫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임대료가 비싼 곳에 위치한 매장 주위는 비싼 레스토랑 밖에 없었기에
나는 돈을 아끼기 위해서 주로 편의점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매일같이 각종 보존료과 첨가물이 범벅된 편의점 음식을 내 안에 채웠고
식생활은 더욱 더 망가졌고 두통은 날이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이때는 편두통인지도 모르고 그냥 항상 머리가 아파서 힘들었고 두통으로 인한 결근 조퇴가 잦아서
직장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삶의 질이 점점 저하되고 우울해지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게 된 때였다.
요양이 필요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일시 귀국을 했다.
일본에서 유학하며 취업해서 사는건 행복했지만 내 몸을 잘 챙기며 살기가 너무 힘들었던 환경이어서
한국에서 제대로 치료를 하자고 마음을 먹고 귀국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두통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고 긴 여정의 병원 투어가 시작된다.